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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엔 전국시대 일본을 그냥 칼싸움 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오사카성 앞에 서서 그 거대한 석벽을 올려다본 순간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걸 전투력 하나로 설명하기엔 뭔가 많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이 각자 무엇을 바꿨는지 직접 성곽과 역사 자료를 찾아보면서 살펴보니, 전국시대는 전쟁만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중앙 권력, 지방 세력의 성장, 상업과 토지 제도의 변화, 새로운 무기의 등장, 그리고 이를 통제하려는 정치적 선택이 모두 얽혀 있었습니다.
오닌의 난이 만든 균열, 전국시대는 왜 시작됐을까
솔직히 이 부분은 저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국시대의 시작을 오닌의 난(1467~1477) 한 사건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역사 자료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닌의 난은 무로마치 막부의 후계 문제와 유력 무사 세력의 갈등이 겹치면서 발생한 장기 내전이었습니다. 전쟁이 교토를 중심으로 장기간 이어지면서 막부의 정치적 권위가 크게 약화됐고, 이후 각 지역의 다이묘가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흐름이 강해졌습니다. 따라서 오닌의 난은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지만, 전국시대가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각 지역의 다이묘들은 스스로 영지를 관리할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분국법입니다. 분국법이란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에서 독자적으로 시행한 법률 체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중앙 정부의 규칙만으로는 지역의 토지와 주민, 무사 조직을 통제하기 어려워지면서 각 지방 영주가 직접 규칙을 만들어 통치한 것입니다.
제가 나고야 지역의 성곽과 역사 자료를 찾아보면서 새삼 실감한 부분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성 하나를 유지하려면 단순히 병사만 많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세금을 거두고 농업 생산량을 관리하고 분쟁을 조정하며 물자를 공급하는 행정 체계가 함께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시대의 성곽을 바라볼 때는 군사 시설이라는 한 가지 기능만 보는 것보다 당시의 정치와 경제가 모여 있던 공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성하정이라는 용어도 중요합니다. 성하정은 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무사와 상인, 장인 등이 모여 형성된 도시를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성은 적을 막는 벽인 동시에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행정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전국시대 일본이 단순히 무사들이 싸우기만 했던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일본 중세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는 중앙의 권위가 약화되는 한편 각 지역의 세력이 독자적인 지배 기반을 형성해 가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물론 이를 단순히 '지방 분권'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당시 사회가 훨씬 복잡했지만, 오닌의 난 이후 중앙과 지방의 관계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은 전국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 오닌의 난(1467~1477):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크게 흔들리는 계기가 된 장기 내전
- 분국법: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 시행한 법률 체계
- 성하정: 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무사·상인·장인이 모여 형성된 도시
- 전국시대의 성곽: 군사 방어 시설인 동시에 행정과 경제가 움직이는 지역 중심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칼보다 제도가 중요했다
오다 노부나가 하면 보통 1575년 나가시노 전투와 조총 이야기가 먼저 떠오릅니다. 저도 처음엔 그 이미지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노부나가가 실제로 추진한 정책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전쟁 못지않게 경제와 유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표적인 정책이 라쿠이치라쿠자입니다. 라쿠이치라쿠자란 기존의 독점적 상업 권리와 시장 장벽을 완화해 유통과 상업 활동을 활성화하려 한 정책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특정 상인이나 집단이 시장을 독점하는 구조를 일부 완화해 더 많은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의 완전한 자유시장 정책으로 이해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지배 영역에서 상업과 유통을 활성화하고 동시에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추진한 정책의 하나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여기서 성하정의 의미도 다시 연결됩니다. 앞서 살펴본 성하정은 노부나가의 통치 방식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성곽을 중심으로 시장과 상업 공간이 형성되면서 성은 더 이상 방어 시설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본의 성곽을 볼 때 예전과 달라진 부분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높은 석벽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성 주변에서 누가 살았고, 무엇을 거래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었을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조총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543년 일본에 전해진 조총은 화약을 이용해 탄환을 발사하는 화기로, 기존의 활과 창 중심의 전투에 새로운 변수를 가져왔습니다. 노부나가가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을 활용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조총 3천 정을 세 줄로 배치해 교대로 연속 사격했다'는 유명한 설명은 후대의 기록과 해석이 섞여 있어 그대로 확정된 사실처럼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전투에서는 조총뿐 아니라 방어 진지와 지형, 병력 운용 등 여러 요소가 함께 작용했습니다.
노부나가가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한 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의 마지막 단계를 이어갔습니다. 히데요시를 생각하면 낮은 신분에서 출발해 최고 권력자가 된 개인의 성공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지만, 제가 자료를 찾아보면서 더 중요하게 느낀 것은 그가 통일 정권을 실제로 운영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태합검지입니다. 태합검지는 전국 각지의 토지를 조사해 경작 면적과 생산량을 파악한 대규모 토지 조사 사업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땅에서 얼마나 생산되는지를 조사해 조세와 행정의 기준을 마련한 것입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역사 자료에서도 도요토미 정권이 토지와 생산량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통치 기반을 정비해 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변화가 병농분리입니다. 병농분리는 무사와 농민의 사회적 역할을 구분하고 무장한 농민이나 무사가 자유롭게 이동하며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제한하려는 흐름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전쟁이 일상적이었던 사회에서 무사와 농민의 역할을 점차 분리해 지배 질서를 안정시키려 한 것입니다. 다만 이 변화가 히데요시 한 사람에 의해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며, 전국 통일 과정에서 진행된 여러 사회적 변화가 이후 에도 시대의 신분 질서로 이어졌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 라쿠이치라쿠자: 기존의 독점적 상업 권리를 완화해 시장과 유통을 활성화하려 한 정책
- 조총: 화약을 이용해 탄환을 발사하는 화기로 전국시대 전투에 새로운 변수를 가져온 무기
- 태합검지: 전국의 토지와 생산량을 조사해 통일 정권의 행정·재정 기반을 마련한 사업
- 병농분리: 무사와 농민의 사회적 역할을 구분해 지배 질서를 안정시키려 한 변화
- 혼노지의 변(1582):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공격으로 사망한 사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남긴 것은 승리보다 오래가는 구조였다
세 사람을 비교했을 때 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셋 중 가장 덜 인상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부나가는 강렬했고, 히데요시는 극적이었는데, 이에야스는 그냥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에도성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에야스의 중요한 능력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그 승리를 장기적인 정치 질서로 연결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하면서 일본 정치의 주도권은 도쿠가와 가문으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1603년 이에야스가 쇼군에 임명되면서 에도 막부가 시작됐습니다. 이때부터 자리를 잡은 통치 구조가 막번체제입니다. 막번체제란 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번이 함께 존재하는 통치 구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도쿠가와 막부가 전국적인 정치 질서를 관리하면서도 각 지역 다이묘에게 일정한 영지 통치 권한을 인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전국시대와 가장 달라진 점은 다이묘가 자유롭게 전쟁을 벌여 세력을 넓히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각 번은 자체적인 행정과 재정 기반을 유지했지만 막부의 규칙과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번이 서로 역할을 나누는 구조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일본 사회는 전국시대와는 다른 안정적인 정치 환경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더해 도쿠가와 막부가 활용한 제도가 산킨코타이입니다. 산킨코타이는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오가도록 한 제도로, 다이묘의 가족이 에도에 머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방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만 머물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중앙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장치였습니다. 다만 모든 다이묘에게 동일한 주기가 적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다이묘의 지위와 영지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산킨코타이는 다이묘에게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주었습니다. 에도와 영지를 오가는 행렬과 체류에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담은 막부가 지방 다이묘의 독자적인 세력 확대를 억제하는 데 일정한 효과를 냈습니다. 동시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늘면서 에도와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와 숙박 시설, 유통망이 발달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의 옛 가도와 역참 마을을 살펴보면 정치 제도가 경제와 생활공간까지 바꾸는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에도 시대의 안정만 강조해서는 역사 전체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엄격한 신분 질서와 사회적 통제, 이동과 사상에 대한 제약도 함께 존재했습니다. 정치적 안정이 커진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가 반드시 같은 속도로 확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에도 시대를 바라볼 때 '260년에 걸친 에도 막부의 장기적인 정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통제와 질서가 필요했는지도 같이 살펴보는 편이 더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 세키가하라 전투(1600):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정치의 주도권을 확보한 결정적 전투
- 에도 막부(1603~1867):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일본을 통치한 막부 체제
- 막번체제: 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번이 함께 운영한 에도 시대의 통치 구조
- 산킨코타이: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에도와 영지를 오가도록 한 중앙 통제 제도
오사카성 앞에서 가졌던 그 질문, "이걸 정말 한 사람의 힘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에 저는 지금도 쉽게 답하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의 흐름을 읽고 선택했지만, 그 선택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오닌의 난 이후 달라진 정치 구조와 지방 세력의 성장, 조총이라는 새로운 기술, 상업과 도시의 발달, 토지와 생산량을 파악하려는 행정 변화가 함께 있었습니다.
전국시대 일본의 성곽을 직접 걷다 보면 역사가 영웅담이라기보다 구조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조금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오사카성이든, 히메지성이든, 나고야성이든 각각 다른 시대의 흔적을 품고 있습니다. 다음에 일본의 성곽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단순히 "누가 이 성을 지었을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성 주변에서 어떤 행정과 경제가 움직였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까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전국시대 일본의 역사가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참고자료
-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National Museum of Japanese History) — 일본 중세·근세 역사와 사회 변화 관련 연구 자료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National Diet Library) — 일본 역사 관련 디지털 아카이브 및 문헌 자료
- 브리티시 뮤지엄(British Museum) — 일본 역사와 문화 관련 소장품 및 연구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