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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를 처음 만든 사람이 옷이 아니라 신발 때문에 고민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습니다. 매일 재킷을 입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올리던 그 지퍼가, 사실 19세기 신발끈 문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지퍼 하나에 기술혁신, 브랜딩, 패션산업의 변화가 모두 얽혀 있습니다.
지퍼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
지퍼가 옷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실제로는 신발에서 출발했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높은 부츠가 유행이었는데, 문제는 그걸 신고 벗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는 겁니다. 끈을 일일이 묶거나 작은 단추를 하나씩 채워야 했으니까요. 저도 등산화 끈을 묶다가 짜증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 시대 사람들은 매일 그런 부츠를 신었습니다.
미국의 발명가 휘트컴 저드슨(Whitcomb Judson)은 1893년 이 불편함을 해결하려고 클래스프 로커(clasp locker)라는 장치의 특허를 받았습니다. 클래스프 로커란 여러 개의 잠금쇠를 슬라이더 하나로 한 번에 결합하거나 분리하도록 설계된 신발용 잠금장치입니다. 특허 명세서에는 한 번의 연속적인 동작으로 잠금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습니다(출처: Google Patents, Judson 특허 US504038 A).
그런데 저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이디어가 좋다고 해서 바로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저드슨의 클래스프 로커는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도 공개됐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작동 중에 걸리는 문제가 자주 발생했고,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배경은 산업화입니다. 산업화란 제품을 공장과 기계 중심으로 대량 생산하는 체계로 전환되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옷과 신발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균일하게 부착할 수 있는 여밈 장치가 필요해졌습니다. 기술적 수요와 시장의 필요가 동시에 맞아떨어지는 시점이었습니다.
- 19세기 후반 높은 부츠의 착용이 대중화되면서 빠른 여밈 장치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다
- 저드슨의 클래스프 로커(1893)는 최초의 슬라이딩 잠금 특허지만, 초기 작동 불안정 문제로 상용화에 실패했다
- 산업화와 대량생산 체계의 확산이 표준화된 여밈 부품에 대한 제조업적 수요를 만들어냈다
지퍼를 완성한 기술혁신, 그리고 이름의 탄생
저드슨의 실패를 딛고 현대적인 지퍼 구조를 완성한 인물은 스웨덴 출신의 기술자 기디언 선드백(Gideon Sundback)이었습니다. 기술혁신이라는 말을 거창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선드백의 사례를 보면 기술혁신이 새로운 발명보다 기존 문제의 집요한 개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드백이 발전시킨 핵심은 슬라이드 패스너(slide fastener) 구조였습니다. 슬라이드 패스너란 두 줄로 배열된 금속 이빨이 슬라이더라는 작은 부품을 통과하면서 서로 맞물리거나 분리되는 구조를 말합니다. 선드백의 1917년 미국 특허에는 유연한 두 개의 띠 위에 잠금 요소를 배열하고, 슬라이딩 장치로 결합과 분리를 제어하는 메커니즘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출처: Google Patents, Sundback 특허 US1219881 A).
솔직히 특허 문서를 처음 봤을 때는 그게 그거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드슨의 장치와 선드백의 구조 사이에는 안정성과 내구성에서 꽤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차이가 결국 지퍼가 실제 제품에 붙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른 것입니다.
이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초기에는 이 장치를 그냥 패스너 혹은 슬라이드 패스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 미국의 고무 제조업체 B.F. Goodrich가 선드백의 장치를 고무 덧신에 적용하면서 Zipper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습니다. 브랜딩이란 제품의 이름과 이미지를 소비자의 기억 속에 각인시키는 과정을 말합니다. 지퍼라는 이름은 슬라이더를 당길 때 나는 소리를 연상시키는 단어로, 1920년대에 빠르게 대중에게 퍼져나갔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작명의 힘은 생각보다 큽니다. '슬라이드 패스너를 올려줘'라고 말했다면 아무도 못 알아들었을 겁니다. '지퍼 잠가'는 지금 초등학생도 압니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람들이 부를 수 있어야 일상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지퍼의 이름 역사가 잘 보여줍니다.
지퍼가 의류산업을 바꾼 방식, 그리고 지금
지퍼가 처음부터 옷에 쓰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이 부분이 꽤 예상 밖이었습니다. 지퍼는 먼저 신발과 부츠에 적용됐고, 이후 가방을 거쳐 1930년대에야 본격적으로 의류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스미스소니언 국립미국역사박물관의 기록에 따르면 지퍼는 1930년대 이후 남성 바지의 앞여밈에도 도입되기 시작했고, 기존의 단추 방식을 점차 대체해 나갔습니다.
패션산업이란 의복을 기획, 디자인, 생산, 판매하는 전반적인 산업 체계를 의미합니다. 지퍼가 패션산업으로 편입됐다는 것은 단순히 부품 하나가 바뀌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새로운 실루엣과 열고 닫는 방식을 실험할 수 있는 도구가 생긴 것이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착·탈의의 번거로움이 줄어드는 경험이었습니다.
지퍼가 의류에 가져온 변화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재킷, 바지, 스포츠웨어 등 자주 열고 닫아야 하는 의류에서 단추 대비 착용 속도를 크게 단축했다
- 표준화된 지퍼 부품이 공장 생산 라인에 결합되면서 의류 제조의 효율이 높아졌다
- 가방과 신발에도 적용 범위가 확장되어 오늘날 거의 모든 여밈 제품에 사용되고 있다
지퍼의 성공이 기술 하나의 뛰어남으로 설명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저드슨의 실패한 아이디어가 사라지지 않고 선드백에게 이어졌고, 제조업체가 그것을 제품에 얹었으며, 누군가가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고, 시장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흐름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지퍼가 성공한 것입니다.
오늘날 스마트폰이나 이어폰을 보더라도 비슷한 구조가 반복됩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제품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실패한 첫 버전이 다음 사람에게 질문을 남기고, 그 질문이 이어질 때 비로소 일상의 도구가 됩니다.
다음에 가방 지퍼를 열거나 재킷을 입을 때, 한 번쯤 손가락을 멈춰보시길 권합니다. 그 몇 센티미터 짜리 슬라이더 안에 신발끈이 귀찮았던 한 발명가의 불편함, 수십 년의 실패와 개선, 그리고 이름 하나를 잘 지은 누군가의 감각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저는 지퍼의 역사를 보고 나서, 좋은 발명은 처음부터 완벽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참고: 출처: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 출처: MIT Lemelson Center